2026년 10월 11일 뉴처치 주일예배 요나서 강해4 https://www.youtube.com/watch?v=BT5rOwwMAj0 요나의 불순종과 이방인의 구원 자, 우리 함께 같이 말씀을 읽겠습니다. 말씀은 요나서 1장 4절에서 17절까지, 세 번째 설교죠. 칡 아시나요, 칡? 칡은 씹으면 씹을수록 단맛이 나옵니다. 사골이라고 그러죠, 사골. 사골은 많이 우릴수록 더 맛이 납니다. 여러분, 이 말씀은 우리가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말씀을 깊이 있게 보면 볼수록 정말 끝이 없습니다. 그냥 아는 말씀이라고 생각하지 마시고, 이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떤 말씀 하실지 기대감을 가지고 함께 같이 읽으며 또 들으며 나아갑시다. 제가 한 절, 여러분이 한 절 읽겠습니다. 그러자 여호와께서 바다에 폭풍을 보내셨습니다. 거친 폭풍우가 배를 위협해 배는 거의 부서지게 됐습니다. 선원들이 두려워했고 사람들은 각자 자기 신에게 소리쳐 부르짖었습니다. 그들은 배를 가볍게 하려고 짐들을 바다에 다 던졌습니다. 그러나 요나는 배 밑층에 내려가 누워 깊이 잠들었습니다. 선장이 그에게 다가와서 말했습니다. "네가 어떻게 잠을 잘 수 있느냐? 일어나 네 하나님께 소리쳐 부르짖어라. 혹시 하나님께서 우리를 생각하사 우리가 죽지 않게 될지도 모른다." 선원들이 서로 말했습니다. "이리 와서 제비를 뽑아 이 재앙이 누구 탓인지 알아내자." 그들이 제비를 뽑았더니 제비가 요나에게 뽑혔습니다. 그러자 그들이 그에게 물었습니다. "우리에게 닥친 이 재난이 누구 때문인지 말해 보아라. 네 직업은 무엇이냐? 어디에서 오느냐? 어느 나라 사람이냐? 네가 어느 민족이냐?" 요나가 대답했습니다. "나는 히브리 사람입니다. 바다와 땅을 만드신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고 있습니다." 그들은 크게 두려워하며 요나에게 말했습니다. "너는 왜 이렇게 행동했느냐?" 그들은 그가 여호와 앞에서 도망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그가 그들에게 말했기 때문입니다. 바다의 폭풍이 점점 더 거세졌습니다. 그들이 그에게 말했습니다. "바다를 진정시키려면 대체 우리가 너에게 어떻게 해야 하느냐?" 그가 대답했습니다. "나를 들어서 바닷속에 던지십시오. 그러면 바다가 잠잠해질 것입니다. 이렇게 엄청난 폭풍이 당신들에게 닥친 것은 나 때문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육지로 돌아가려고 힘껏 노를 저었습니다. 그래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바다의 폭풍이 더 거세졌습니다. 그러자 그들이 여호와께 부르짖었습니다. "여호와여, 제발 이 사람의 목숨 때문에 저희가 죽게 하지 마십시오. 죄 없는 피 흘림을 우리가 책임지게 하지 마십시오. 여호와여, 주께서는 원하는 대로 하십시오." 그리고 그들은 요나를 들어서 바닷속으로 던졌습니다. 그러자 사나운 바다가 잔잔해졌습니다. 그들이 여호와를 크게 두려워하며 그들은 여호와께 희생 제물을 드리고 서원했습니다. 여호와께서는 큰 물고기를 준비하셔서 요나를 삼키게 하셨습니다. 요나는 그 물고기 뱃속에서 3일 밤낮을 보냈습니다. 아멘. 네. 여러분, 제약의 역사에서는 어떤 부작용에 의해서 본래의 작용 외에 부수적으로 일어나는 그 되게 좋지 않은 작용, 그게 오히려 유용하게 사용이 되는 경우가 많이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 부작용이 오히려 다른 병에 더 효율적으로 입증되어서 소위 말하는 대박을 치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여러분, 보톡스 아세요, 보톡스? 여기 보톡스 맞으신 분 계십니까? 이 보톡스가 보통 이 성형외과에서 쓰이는 주름 펴는 그런 주사라고 얘기를 하잖아요. 근데 사실 이 보톡스는 썩은 음식이나 토양 속에서 나오는 아주 강한 독소예요. 보툴리눔이라는 독소입니다. 맹독이거든요. 이 맹독이 처음에는 이 사시 교정이나 여러분 눈 떨림 아시죠? 눈이 이렇게 막 파르르 떨리는 거를 교정시키기 위해서 안과에서 사용됐던, 안검 경련증 환자에게 사시 교정 치료제로 쓴 그런 약이었던 겁니다. 근데 이제 캐나다 안과 의사가 이 보툴리눔 톡신을 주사하다가 눈에 주사를 했는데 갑자기 미간의 주름이 없어지는 거를 발견한 거예요. 그래서 그 남편이 피부과 의사였는데, 피부과 의사인 남편이 이 효과에 주목해서 주름 개선의 효과를 보고 성형외과에서 이것을 더 본격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는 겁니다. 여러분, 요즘에 유행하고 있는 마운자로, 위고비 아시나요? 다이어트 약이라고 하죠. 다이어트 약이라고 하는데 그게 원래는 당뇨약입니다, 당뇨약. 당뇨약인데 이 단백질 호르몬제가 당뇨를 치료하기 위해서 원래 주사를 놨는데 당뇨를 치료하다 보니까 이 살이 빠지는 걸 알게 된 거예요. 그래 갖고 이게 요즘에는 당뇨약이 아니라 비만 치료제로 사용이 된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이런 현상들을 일컬어서 이 제약의 부작용이 인류에게 가져다준 선물이다, 이렇게 얘기를 합니다. 근데 이거를 가만히 살펴보면 우리가 받은 구원도 사실은 이런 측면이 있다라는 거예요. 우리는 지금 요나서를 읽고 있습니다. 요나의 불순종, 하나님과 요나가 지금 싸우는 거거든요. 요나의 불순종이 이방 선원들에게 구원을 가져다준 거예요. 이스라엘의 불순종이 이방인의 순종과 구원, 회개를 먼저 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만들었다는 것. 여러분, 이게 바로 우리가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겁니다. '어부지리'라는 고사성어가 있잖아요? 그런 거하고 비슷한 거예요. 사도 바울은 이것을 복음의 비밀이라고 얘기합니다. 로마서 9장에서 11장까지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그렇게 설득하려고 하셨지만 이스라엘이 마치 여기 있는 요나처럼 끝까지 고집을 부리면서 심지어 자기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기까지 했단 말이죠.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 은혜의 복음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이방인이 먼저 듣게 하고 이방인이 먼저 구원을 얻게 한 다음에 그것을 이스라엘이 보고 시기 나게 해서 마지막 때에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겠다. 자, 이게 사도 바울이 깨달은 복음의 비밀이고 그래서 사도 바울이 세상 끝까지 가서 복음을 증거하려고 했다는 겁니다. 이방인이 먼저 구원을 다 받아야, 이방인 우리 같은 사람들이 먼저 구원을 얻어야 이스라엘이 마지막에 구원을 얻고 하나님 나라가 온전하게 오기 때문에 그렇다는 겁니다. 자, 우리는 요나서에서 이런 은혜의 복음의 그림자를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지난 두 주 동안 이 요나서 1장 4절부터 17절까지를 살펴봤어요. 첫 번째는 하나님께서 얼마나 끈질기게 요나를 찾아오셔서 사랑하시는지, 은혜의 기회를 주시는지. 그 큰 폭풍을 일으키셔서 고난의 은혜를 주셔서 회개의 기회를 주시고, 선장을 보내셔 갖고 뭐예요? 자기가 들은 말씀을 기억하게 하셔서 깨닫게 하시고, "일어나 네 하나님께 부르짖으라!" 그 말씀을 깨닫게 하시고. 그것도 안 되니까 이제 제비뽑기를 해서 요나가 뽑히도록 해 갖고 섭리, 우연이 겹치면 섭리가 된다 그랬죠. 섭리를 통해서 요나로 돌아오게 하시고. 그것도 안 되니까 선원들로 하여금 질문하게 하셔서 자기의 정체성을 드러내게 하시는 그런 은혜, 이 하나님의 마치 사냥개와 같이 끊임없이 추적해 오시는 그런 사랑. 근데 요나는 우리 지난주에 봤듯이 거기에 끈질긴 불순종을 하는 거죠. 그래서 도망칠 때 배 밑바닥에 들어가 갖고 자기만의 안정 욕구, 안전한 공간 가운데 숨어 들어가서 하나님을 피하는 그런 불순종. 또 동시에 자기만의 안식처에서 곤한 잠을 잘 뿐만 아니라 종교적 자존심을 내세우면서 "나는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을 믿는 히브리 사람이다."라고 이야기를 하고. 그리고 결국에는 나중에 보면 알겠지만 자기를 "바다에 던지라."라고 이렇게까지 얘기하는, 종교적 자존심이 자포자기까지 하는 그런 불순종의 결과를 낳는 겁니다. 끊임없이 '내가 니느웨에 가서 복음을 증거하느니 차라리 죽겠다. 나를 던져라. 나만 없어지면 된다.' 이렇게 얘기했던 거죠. 자, 그러면 이 요나의 끈질긴 불순종과 하나님의 끈질긴 사랑이 충돌하고 있는 사이에 누가 어부지리로 구원을 얻습니까? 이방인들이 하나님을 깨닫는 거예요, 이방인들이. 요나를 돌이키기 위해 사용됐던 하나님의 모든 은혜의 수단, 긍휼의 수단이 이방 선원들에게 적용이 돼서 이방 선원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이방 선원들이 여호와를 더 두려워하고, 이방 선원들이 제사와 서원을 드리고, 이방 선원들이 하나님을 경외하게 되는 회개의 모습, 구원을 얻게 되는 그 모습까지 나타나게 된 겁니다. 헨리 나우엔이 쓴 '영적 발돋움'이라는 책이 있는데요. 꼭 한번 읽어 보십시오. 근데 저는 그것을 좀 응용해서 오늘 우리가 읽은 요나서 1장 4절부터 17절을 이방인들의 영적 발돋움, 우리의 영적인 여정의 모습을 보면서 "아, 우리가 얼마나 은혜를 받았고 우리가 여기서 은혜받았다는 게 도대체 어떤 의미일까?" 이거를 함께 같이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갖길 원합니다. 여러분, 보십시오. 우리가 다 아는 얘기 같지만 처음에 어떻게 했습니까? 선원들이 폭풍을 두려워하다가 나중에 하나님을 두려워합니다. 요나는 자기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이다 이야기했지만 진짜 하나님을 두려워한 것은 이방인들이었단 말이죠. 선원들이었다는 거예요. 결국에는 이것을 우리한테 적용하자면 세상의 풍파, 질병, 돈, 사람 이런 거 눈치 보고 두려워하다가 뭐예요? 결국 하나님을 경외하는, 하나님을 정말 두려워하는 그 두려움, 온전한 경외감으로 우리가 바뀌게 된다는 거죠. 두 번째는 이 사람들이 이 폭풍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온갖 짓을 다 합니다. 물건도 던지고, 그렇잖아요? 제비도 뽑고 다 해요. 물건 던지는 거부터 먼저 보면 물건을 던지면서 결국에는 문제의 핵심인 요나를 집어던져야 하나님을 깨닫게 되는 거죠. 그러니까 가장 깊숙이 박혀 있던, 배 밑에 있었던 요나, 우리 마음속 깊은 곳에 있었던 요나 같은 그런 자존심, 우리 마음속 깊은 곳에 뿌리 깊이 박혀 있는 우리의 죄악, 우리의 잘못된 욕심 이런 것들을 던져야 살아 계신 하나님을 만나게 된다는 거예요. 비워지면 하나님이 채워 주시는 거예요. 우리가 비워 낼 때 하나님이 인격적으로 우리를 만나 주셔서 우리의 만족함, 우리의 기쁨, 소망, 능력이 되는 겁니다. 아멘. 이게 말이 쉬운 거 같은데 이게 쉽지가 않습니다. 내가 던져 버리는 게 내 자신이 가지고 있는 고정관념, 상식 이런 것들을 다 던져야 되는 거거든요. 세 번째는 이 선원들이 제비뽑기를 했잖아요, 그렇죠? 이 제비뽑기는 뭐라 그랬습니까? 그 당시 이방 종교에서 유행하던 운명을 알기 위해서 의존하는 방식이었단 말이에요. 신의 섭리가 무엇인지 깨닫게 하기 위해서. 근데 그 제비 뽑던 이방 선원들이 마지막에는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그분께 예배를 드리는 겁니다. 우상 숭배하던 사람들이 우상을 버리고 더 이상 제비뽑기 이런 거 안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만 섬기겠다고 고백하는 참 예배자로 서는 겁니다. 여러분, 이게 우리 아닙니까? 우리가 다 이전에 이랬던 사람이었는데 구원받은 이방 선원들처럼 참 예배자로, 하나님만 붙들고 하나님만으로 만족을 얻는 사람들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로 우리를 바꾸어 주셨다는 겁니다. 할렐루야. 여러분, 이게 요나서에 있는 복음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걸 하나씩 보면서 "아, 우리가 이전엔 어떤 사람이었고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바꾸어 가려고 하시는지." 제가 그랬잖아요. 요나서, 예언서는 어떻게 읽어야 된다고요? 거울이나 창문으로 봐야 된다. 거울은 뭐예요? 우리의 모습을 보는 거죠. 요나의 불신앙, 요나의 고집, 요나의 죄악 이런 것들을 보면서 우리 안에 뿌리 깊이 박혀 있던 것들을 보고. 창문은 뭘 보는 겁니까? 하나님의 은혜. 이방 선원들처럼 우리를 하나님께서 참 예배자로, 참 경외자로, 하나님만으로 만족하는 사람들로 그렇게 만드시겠다는 그 의지, 미래에 우리에게 주실 그 은혜, 그거를 우리가 바라보는 겁니다. 우리가 이렇게 되게 하기 위해서 우리를 예수 안에서 부르셨다는 겁니다. 본능과 상식에서 믿음의 반응으로 자, 그래서 우리가 어디서부터 시작해서 어떻게 영적 발돋움을 하고 있는가, 혹은 해야 되는가, 이걸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첫 번째는 뭐냐면 본능적이고 상식적인 반응에서 믿음의 반응으로 나아가야 된다는 거예요. 본능적인 반응이 뭘까요? 4절과 5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바다에 큰 바람을 던지셨다" 그랬어요. 그랬을 때 폭풍우가 배를 위협했다 그랬죠. 여기 위협한다는 게 의인화된다 그랬어요. 그러니까 여러분, 우리가 인생의 많은 고난이 있는데 이 고난이 인격적으로 우리한테 보여지는 거죠. 지금 이 요나서는 그렇게 그리고 있는 겁니다. 폭풍우가 그냥 바다에서 흔히 일어나는 바람에 의한 기후 현상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어떤 목적을 가지고 보내신 폭풍우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거는 사람의 상식과 사람의 전문적인 지식과 경험으로는 해결이 안 되는 고난이라는 거예요. 할렐루야. 근데 이거를 어떻게 해결하려고 했습니까? 자기들이 받은 훈련, 자기들이 받은 경험과 상식으로 해결하려고 그래요. 그래서 어떻게 했습니까? 5절 한번 같이 읽겠습니다. 선원들이 두려워했고 사람들은 각각 자기 신에게 소리쳐 부르짖었습니다. 그러고는 배를 가볍게 해 보려고 짐들을 바다에다 던졌습니다. 그러나 요나는 배 밑층에 내려가 누워 깊이 잠들었습니다. 자, 요나가 배 밑에서 깊이 잠들고 있는 한 배 위에서 아무리 물건을 던져 봐야 가라앉지 않는 거죠. 문제의 본질이 지금 밑에 있는데 그 문제의 본질을 깨닫지 못하고 자기가 알고 있는 상식대로 기물을 던지는 거예요. 이게 바로 우리가 보통 말하는 상식적인 반응입니다. 상식적인 반응은 어떤 위기 상황에서 문제의 본질, 우리 안에 깊이 자리 잡고 있는 근본적인 가치를 드러내지 않습니다. 고난이라는 건요, 어려움은 원래 자기가 믿고 있는 어떤 가장 중심적인 가치관이 위기 상황에서 드러나는 거예요. 보통 때는 다 나이스하고 다 신앙이 좋은 거 같고 다 아주 인격적인 거 같아요. 근데 진짜 어려운 문제가 닥쳤을 때 그때 그 사람의 본색이 드러난다는 거죠. 그 사람이 진짜 믿고 있는 게 드러난다는 거죠. 여기 진짜 믿고 있는 요나가 깊이 가라앉아 있는데 자기들이 알고 있던 상식, 자기들의 신의 이름을 부르며 자기들이 경험했던 선원의 경험들, 선원의 지식들 이런 것들을 발휘해 가지고 물건을 던지죠. 왜? 배를 가볍게 해야 배가 가라앉지 않으니까. 그렇죠? 근데 기물을 던졌는데도 배는 가라앉지는 않아요. 가라앉지 않는데 폭풍이 안 멈춰. 그리고 계속 뱅글뱅글 제자리를 돈다는 거죠. 이게 문제인 거예요, 이게. 이게 바로 본능적인 반응이나 상식적인 혹은 경험에 의해서 우리가 반응했을 때 뭔가 풀어지지 않는 것, 이것이 올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돼요? 그 안에 있는 깊은 영적인 원인을 깨달아야 되는 거예요. 풀리지 않는 것에 대해서 일단 감사해야 되는 거예요, 감사. 여러분, 여기서 본능적인 반응대로, 상식적인 반응대로 폭풍이 만약에 통제가 돼서 폭풍을 빠져나왔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럼 하나님을 찾을 수 있었겠습니까? 못 찾죠. 하나님 못 찾습니다. 보세요, 제자들이 마가복음 4장에 풍랑을 만나잖아요, 갈릴리에서. 그때 어떻게 합니까? 그 사람들도 여러 가지로 애써서 그 폭풍을 건너가려고 해요. 왜 그렇습니까? 거기에 전문직 선원들, 베드로, 요한, 야고보, 평생 고기를 잡았던 어부였던 사람들이 있었으니까 갈릴리 바다를 다 알고 꿰고 있다고 생각을 했겠죠. "이 정도 폭풍이야 우리가 헤쳐 나갈 수 있다." 근데 자기 상식과 자기의 능력,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을 다 해보다가 안 되니까 결국 뭐예요? 예수님을 깨우잖아요.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보지 아니하시나이까?" 여러분, 영성 훈련이라는 것은, 믿음의 훈련이라는 것은 다른 게 아니라 어떤 고난이 왔을 때 먼저 하나님께 딱 엎드리는 겁니다. 내 상식으로 해답을 먼저 괄호 안에다가 쓰고 하나님 앞에 결재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괄호를 비워 두고 납작 엎드리는 겁니다. 만약에 제자들이 먼저 예수를 찾았다면 문제가 달랐겠죠. 어쨌든 우리는 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자기의 경험대로 했는데 되지 않을 때 이제는 뭘 기대해야 되느냐? 하나님께서 새롭게 여시는 통로, 뭔가 새로운 방식의 해답을 우리한테 알려 주시기 위해서 인생의 풍랑이라는 고난을 우리한테 허락하신다는 거죠. 여러분, 이게 어려운 거예요. 뭔가 안 되는데 또 되는 거 같지도 않아. 이게 참 어려운 거죠, 그렇죠? 자, 생각을 해 보십시오. 우리가 이 폭풍을 인생에 한 번 이상은 반드시 만납니다. 근데 그 만날 때 그것이 하나님을 새롭게 경험하는 통로인가, 아닌가? 여기서 이제 믿음이 결정이 되는 거예요. 이게 은혜라고 여겨졌을 때 우리는 하나님을 더 깊이 새롭게 만나는 겁니다. 근데 우리가 본능과 상식대로, 경험대로 반응할 때 이제는 하나님을 만날 수 없다라는 거죠. 하나님은 폭풍 뒤에 계시는 겁니다. 경험이나 본능적인 반응으로는 풀어지는 문제가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가 자꾸 상식적인 해답을 하나님 앞에 들이밀면서 고집을 부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먼저 바라보고 하나님께 부르짖는 그 모습을 가져야 됩니다. 이것을 은혜라고 여기고, '고난이 내게 은혜다. 하나님께서 뭘 하시려고 하시는가? 하나님이 어떤 뜻을, 하나님이 어떤 성품을 나로 알게 하시기 위해서 이런 고난을 허락하셨는가?' 이거를 우리가 생각해야 됩니다. 그렇게 생각할 수 있도록 예수 안에서 우리를 먼저 택해서 부르신 겁니다. 종교적 반응에서 계시의 반응으로 자, 두 번째는 사람들이 어떤 반응을 보입니까? 이제 해도 안 되니까 제비를 뽑자 그러죠. 7절 한번 같이 읽겠습니다. 선원들이 서로 말했습니다. "이리 와서 제비를 뽑아 이 재난이 누구 탓인지 알아내자." 그들이 제비를 뽑았더니 제비가 요나에게 뽑혔습니다. 이제 선원들은 자기의 경험과 지식으로는 도저히 풍랑에서 벗어날 도리가 없다는 것을 알았다는 거죠. 근데 가라앉지도 않고 벗어나지도 않아요. 그냥 딱 갇힌 것처럼, 폭풍 안에 갇힌 것처럼 느꼈을 때 그 사람들이 생각했던 건 뭐냐면 '아, 이건 운명이구나. 뭔가 초월적인 힘에 의해서 폭풍 속에 우리가 갇혀 있구나.' 그럴 때 이방인들이 생각하는 게 뭡니까? 제비뽑기라는 거예요, 제비. 초월적인 힘, 그 운명을 깨달은 것이고 그 운명에 따를 준비를 하게 됐다, 이게 바로 제비뽑기라는 거예요. 이게 바로 두 번째, 우리가 벗어나야 되는 종교적 반응입니다, 종교적 반응. 여기서부터는 뭔가 믿음을 찾을 수 있는 길이 열려요. 우리가 보통 간증이나 이런 것들을 듣다 보면 이런 선원들 얘기와 비슷한 걸 듣잖아요. "막 하다가 안 되니까 결국 하나님을 찾게 됐고 그래서 문제가 해결됐다." 근데 그 문제가 해결돼서 하나님을 발견하면 좋은데 문제가 해결돼서 거기가 끝이면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는 거죠. 그러니까 이 단계에서는 '아, 뭔가 나 이상의, 이 세상 바깥에 어떤 초월적인 힘이, 신이라는 것이 존재하는구나'라고 느끼는 데서 멈추면 안 된다는 거예요. 하나님을 아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거예요. 이 단계에서는 문제가 해결되는 것보다 하나님을 제대로 알게 되는 것이 훨씬 중요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되냐면 계속 "비나이다, 비나이다" 하면서 기복 종교로 끝나는 거예요. 여러분, 왜 사람들이 무당을 찾아가는지 아십니까? 뭔가 운명, 뭔가 섭리, 뭔가 이 세상을 움직이는 보이지 않는 어떤 힘이 있는데 그걸 좀 깨닫고 싶은 거예요. 거기에 의지하고 싶은 거예요. 그래서 물 떠 놓고 "비나이다, 비나이다" 하는 겁니다. 우리는 그런 종교가 아니에요, 그렇죠? 우리는 예수님이 해답이고, 예수님이 인격적인 하나님의 아들로 우리와 관계를 맺으시면서 여전히 우리를 인도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들이잖아요. 선원들이 두려워한 이유는 알 수 없는 어떤 운명의 힘을 느꼈기 때문인 거예요. 그다음에 또 두려워합니다. 뭘 두려워해요? 제비를 뽑아서 요나가 나오잖아요. 요나가 자기 자신을 소개하면서 누구를 소개해요? "나는 히브리 사람이다" 그러면서 9절에 보니까 "바다와 땅을 만드신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고 있다." 자, 이제 처음으로 이방 선원들이 하나님을 알게 됩니다. 이게 복음인 거죠, 그렇죠? 요나를 통해서 하나님을 소개받았을 때, 하늘의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분이 지금 이 풍랑을 만드시고 요나를 쫓아온 분이구나 하고 깨닫고 두려워하는 거예요. 자, 이제 두려움의 종류가 바뀝니다. 폭풍을 두려워하던 것에서 거대한 초월적인 힘이 곧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것을 두려워하는 거죠. 그걸 깨닫고 두려워하는 거예요. 그런데 여기서 멈추면 안 되는 거예요. 그 초월적인 신, 하나님이라고 존재하는 그분이 나랑 관계가 있어야 돼요. 지금 여기는 아직 이방 선원들이 여호와 하나님과 관계가 없는 거예요. 일단은 두려워하는 겁니다. 이 관계가 없으면 이제 문제가 더 심각해지는 거죠. 어쨌든 여기서 반전이 일어납니다. 요나는 하나님을 입으로 두려워한다고 말하지만 자기 고집대로 지금 도망가면서 실제로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잖아요. 근데 이 하나님을 전혀 모르던 이방 선원들은 초월적이면서 인격적인 하나님의 능력 앞에 두려움을 느끼는 거예요. 상황을 보면서 하나님이심을 깨닫는 겁니다. 하지만 아직 그들의 하나님은 아니었어요. 나의 하나님은 아니었다는 겁니다. 폭풍을 두려워하는 두려움에서 폭풍을 주관하는 큰 신 여호와 하나님이 계시다라는 두려움까지 온 거예요. 여기서 우리가 깨달아야 되는 건 뭐냐 하면, 여러분, 우리가 계시의 말씀을 듣고 여전히 폭풍이 두렵고, 여전히 사람이 두렵고, 여전히 돈이 두렵고, 여전히 우리의 미래가 두렵다면 우리는 이방 선원보다 못한 상태에 있다는 거예요. 이방 선원들은 요나의 계시의 말씀을 듣고 요나가 소개한 그 하나님을 듣고 믿었던 거예요. 그리고 그 두려움을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으로 알게 된 거죠. 그래서 폭풍보다 폭풍 뒤에 있는 하나님을 지금 더 두려워하게 된 겁니다. 근데 오늘 계시의 말씀을 듣고도 하나님이 두려우시고 크신 분이고 위대하신 분이고 니느웨보다 더 큰 분이고 어떤 악보다 큰 분이고 큰 폭풍을 보내시고 큰 두려움이 임하게 하시는 분임을, 이 크신 하나님에 대해서 우리가 깨닫지 못할 때 우리는 세상이 두렵고, 폭풍이 두렵고, 여전히 돈이 두렵고, 여전히 사람이 눈치 보이고, 여전히 내가 하고자 하는 그 일이 잘될까 안 될까 미래가 두려운 겁니다. 자, 그렇게 됐을 때 하나님께서 이 사람들을 그냥 거기다 놔두지 않고, 이제 요나가 끊임없이 고집을 부리니까 요나를 회개하게 하기 위해서 우리 같은 사람들인 이 사람들에게 은혜를 주십니다. 그래서 이 사람들에게 이제 종교적인 반응에서 계시의 반응으로 온 거예요. 상식의 반응에서 종교의 반응으로, 종교의 반응에서 계시의 반응으로 넘어오는 겁니다. 양심의 한계를 넘어선 전적인 굴복 그다음이 양심의 반응입니다. 양심의 반응이 뭡니까? 그렇게 해서 깨닫고 두려워졌는데 폭풍이 점점 더 거세졌어요. 그랬더니 "이제 우리가 어떻게 해야 되느냐?" 요나가 "나를 들어서 바다에 던지라" 그래요. 자기가 빠지면 되지 굳이 이방인 손에 들려서 던짐을 당하려고 한다는 거죠. 이게 요나의 자존심 때문에 그런 거죠. 그러면서 "이렇게 엄청난 폭풍이 당신들에게 닥친 것은 나 때문인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랬더니 이 사람들이 어떻게 반응을 했습니까? 13절, 이게 우리의 반응일 수도 있다는 거죠. 13절 읽겠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육지로 돌아가려고 힘껏 노를 저었습니다. 그럴지라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바다의 폭풍이 더 거세졌습니다. 이게 바로 우리의 양심의 반응이에요. 여러분, 이게 사실은 최후의 보루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 중에 가장 어려운 부류들이 바로 자기 양심이 깨끗하다, 자기 양심이 올바르다, 자기가 옳다라고 생각하는 바리새인 같은 사람들이죠. 예수님을 받아들이기가 어려워요. 자기가 죄인이어야 예수님이 필요한데, 자기가 부족해야 예수님이 필요한데 자기가 이미 어느 정도 자신이 있고 어느 정도 옳다라고 느끼는 사람들이니까 어려운 거죠. 이 사람들의 양심은 뭡니까? 문제 해결을 물어봤는데 요나가 "던지라" 그러잖아요. 근데 '요나를 던질 수는 없다' 이렇게 생각하는 거죠. 그래서 어떻게 합니까? 힘껏 노를 저었습니다. 요나를 제거하면 폭풍이 가라앉는다는 해답을 들었는데, 그거를 받아들이지 못한 거예요. 그래서 자기들 생각의 기준으로 "그래서는 안 될 것 같다"라고 생각하니까 힘껏 노를 저은 겁니다. 자기 생각의 기준이 하나님과 요나 사이에 벌어지고 있는 이 씨름과 계시를 이해하지 못한 거죠. 그래서 열심히 육지를 향해 노를 저었다. 여기 히브리어에 아주 재밌는 표현이 있습니다. 땅을 판다 이 말이에요. 여러분, 삽질한다는 말 들어봤죠? 노를 젓는다는 표현이 아니라 바다를 파듯이, 땅을 파듯이 바다에 노를 저었다. 그만큼 노력을 많이 했다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마치 모터를 앞에 놓고 거꾸로 노를 저어서 나아가려고 하는 거하고 똑같은 거죠. 바다를 거스르려고 하는 겁니다. 여러분, 바다 수영해 보셨어요? 제가 예전에 어렸을 때 수영장에서 수영을 배우다가 바다에 가서 수영을 했는데 파도가 이렇게 오잖아요. 근데 나는 분명히 수영을 치고 멋있게 스트로크를 하는데 앞으로 안 나가요. 그 자리인 거예요, 제자리. 제가 이 선원들의 마음을 이해합니다. 여러분, 이게 어려운 거거든요. 마치 우리가 열심히 노력하는데 제자리에 있는 것 같은 그런 모습인 거예요. 이게 왜 그럴까요? 요나의 계시를 사람의 말로 받아서 그래요. 자기 양심으로 판단해서 그렇습니다. 자기 양심이 지금 잘못 길들여져 있고 자기의 세계관과 가치관이 성경 위에 세워져 있는 게 아닌데, 하나님 말씀이 딱 들어왔는데 그거를 자기의 생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판단하는 겁니다. 요나가 "나를 들어 던지라." 이게 지금 하나님의 계시였거든요? 근데 그거를 이 사람들은 자기의 종교적인 양심으로 "아이, 그건 안 되지" 하고 자기 스스로 해결하려고 열심히 노를 젓는 겁니다. 이게 말씀을 봉쇄하면서 받아들이지 못하는 거예요. 양심에 걸리지 않는 말만 받겠다 이거죠. 이런 사람들이 예수 믿기가 어려운 거예요. 저 같은 사람들. 그래서 야고보서에도 그러잖아요. 많이 선생이 되지 말라. 많이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많이 경험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오히려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들이기가 어렵다는 거예요. 왜? 자기 기준에 맞는 말씀만 선택하려고 하니까, 편식한다고 그러죠? 말씀도 이렇게 편식하는 겁니다. 결국에는 진이 빠져서 이제 하나님 앞에 두 손 들고 나오는 거죠. 이 사람들은 자기들의 잘못 길들여진 양심이 하나님의 말씀을 판단하고, 말씀 위에 자기들의 양심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더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던지라"라는 말에 열심히 노를 젓는 거예요. "떠나라"라는 말에 주저앉고, "놔줘라, 흘려보내라" 하는 말에 여전히 움켜쥐고, "엎드려 기도하라"라는 말에 뭔가 움직여야 될 것 같고 누구를 만나야 될 것 같은, 이런 것이 바로 영적인 문제입니다. 하나님 말씀에 내가 믿음으로 반응하는 게 아니라 내 양심, 내 상식, 내 기준으로 반응하는 거죠. 자, 그렇게 됐을 때 하나님께선 이들에게 은혜를 주셔서 더 나아가게 하십니다. 이 양심의 반응에서 이제 끝을 보는 거죠. 폭풍이 더 거세지니까 결국 손을 듭니다. 14절 한번 같이 읽겠습니다. 그러자 그들이 여호와께 부르짖었습니다. "여호와여, 제발 이 사람의 목숨 때문에 저희가 죽게 하지 마십시오. 죄 없는 피 흘림을 우리가 책임지게 하지 마십시오. 여호와여, 주께서는 원하는 대로 하십시오." 아멘. 여러분, 이 기도를 잘 기억하십시오. 2장에 나오는 요나의 긴 기도와 이 짧은 기도를 잘 비교하셔야 됩니다. 여기서 이 사람들은 이제 진정한 기도를 드립니다. 왜 그럴까요? 자기 모든 생각과 자기 모든 시도가 다 막히니까 결국 하나님 앞에 진실하게 부르짖을 수밖에 없는 거예요. 이게 간절한 기도고 이게 진정한 기도입니다. 모든 내 생각과 내 방법과 내 방식이 포기되고 하나님의 뜻에 자기의 뜻을 굴복시키는 것. "내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시옵소서." 여러분, 이게 기도예요. 이게 응답받는 기도의 비결입니다. 요나를 쫓아서 하나님이 폭풍을 보내셨고 제비를 뽑게 하셔서 하나님이 요나를 뽑히게 하셨는데, 이제는 하나님께 자신들이 직접 간구하는 수밖에 없는 거죠, 직접. 여러분, 이 기도를 통해서 드디어 이 선원들은 하나님을 여호와 하나님, 자기들의 하나님이라 부르는 거예요. 요나한테 들었던 그의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 부모님 하나님이 아니라, 목사님 하나님이 아니라 내 하나님,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여, 우리 하나님이여, 이렇게 부를 수 있다는 겁니다. 왜? 이거 안 하면 죽으니까. 그래서 여러분, 이 선원들이 어떻게 시작했습니까? 5절에 각각 자기의 우상, 자기 신들의 이름을 부르다가 "여호와여"라고 부릅니다. 여호와가 누구의 이름입니까? 이스라엘에게 준 언약의 이름이잖아요. 이스라엘만이 받을 수 있는 특권의 계시의 이름이란 말이에요. 그 이름을 지금 이방인들이 인격적인 대상으로, 초월적인 대상으로 "주님, 하나님, 여호와 하나님" 이렇게 고백하는 겁니다. 요나가 여호와의 이름을 안 불러요, 그렇죠? 요나는 여기서 끝까지 기도 안 합니다. 물고기 뱃속에 깊이 들어가야 기도해요. 기도 안 합니다. 나 같았으면 진작에 기도했을 텐데 안 해요. 근데 누가 기도합니까? 이방인들이 기도하잖아요. 요나가 부르짖지 않으니까 누가 부르짖습니까? 이방인들이 부르짖잖아요. 그래서 뭐라고 합니까? "구하고 구하오니." 여러분, 이게 아주 간절하다는 이 히브리어 뉘앙스를 잘 살린 거예요.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에게 죄를 돌리지 말라"고 이렇게 기도하는데, 이건 뭐냐 하면 그 당시 뭇 이방신들, 변덕스러운 이방신들은 인신 제사를 통해서 폭풍을 가라앉히는 그런 일들이 있었단 말이죠. 지금도 저기 동남아나 어디에 가면 인신 제사, 인신공양 뭐 이런 거, 심청전 여러분 그런 거 아시잖아요? 사람을 제물로 빠뜨려 갖고 폭풍 신을 가라앉힌다. 근데 이방 사람들이 여호와를 그렇게 취급하지 않는 거예요. "이 사람을 우리가 바침으로써 폭풍을 가라앉히는, 이게 아닙니다. 당신은 그런 분이 아닙니다." 여러분, 이걸 인정하는 거죠. 여호와 하나님을 우상처럼 대우하지 않은 것, 자기가 하는 일들이 이방 종교의 인신 제사가 아님을 고백한 거죠. 그래서 "무죄한 피를 우리에게 돌리지 말아 달라. 이렇게 던지는 게 폭풍을 가라앉히기 위해서 우리가 인신 제사 드리는 게 아니다" 이렇게 고백하는 겁니다. 그리고 자신들이 하나님을 대신해서 요나를 처리하는 게 아니다. 요나는 그걸 원했던 거죠. 자기가 직접 빠지기보다는 "나를 들어 던지라. 너희들 손으로, 내 손에 피 안 묻히고 너희들 손으로 내가 자포자기하겠다. 그걸 너희들 손으로 하겠다" 이렇게 한 거잖아요. 근데 처음부터 요나의 입에서 나왔어야 될 그 말씀이 이 사람들의 입에서 나오는 거죠. "죄 없는 피를 우리에게 돌리지 마십시오." 그러고 나서 "여호와여" 또 나옵니다. "주께서는 원하는 대로 하십시오." 여러분, 이게 요나서의 주요 주제입니다. 구원은 하나님께 속해 있다. 아멘. 구원받을 자를, 긍휼받을 자를 택하시는 것은 하나님이다. 그러니까 니느웨, 요나가 볼 때는 죽어 마땅한 사람들이지만 그 사람들에게도 은혜를 베푸시는 분은 하나님이다. 구원은 하나님의 주권에, 하나님께 속해 있다. 이 사람들이 뭐라고 합니까? 요나 입에서 나왔어야 될 그 믿음의 고백은 "주님의 뜻대로, 원하는 대로 하십시오. 당신이야말로 뜻대로 하시는 여호와이십니다." 여러분, 이게 히브리어 원어의 번역인 거예요. "당신이야말로." 이게 강조가 돼 있는 거예요. 무슨 얘기예요? 하나님을 '당신', 인격적인 대상으로 이방 선원들이 부를 수 있다는 것. 여러분, 이게 우리에게 전해 준 복음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직접 대면해서 부를 수 있다는 것, "주님의 뜻이 이루어집니다"라고 예수님의 기도의 가르침을 따라서 기도할 수 있다는 것. 여러분, 이게 믿음의 고백 아닙니까? 할렐루야. 이게 바로 구원과 심판이 하나님께 속해 있다라는 이 고백을 통해서 이방 선원들이 드디어 하나님을 자기들의 하나님이라고 믿게 되는 겁니다. 이걸 우리가 깨닫지 못하면 마리아의 얘기가 이해가 안 되는 거죠. 마리아한테 와서 "처녀가 잉태하겠다"라고 하니까 그거 위험한 발언이잖아요. 그래서 마리아가 그때 "그게 어떻게 가능하냐? 난 못 한다. 난 시집도 안 갔다. 어떻게 시집도 안 간 처녀가 애를 낳는단 말이냐?" 여러분, 이렇게 거부했으면 얘기는 다른 이야기로, 혹은 마리아 말고 다른 여자를 찾았겠죠. 근데 마리아는 뭐라고 했습니까?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자, 이방 선원들이 이제 순종합니다. 15절 보니까 그들이 요나를 들어서 바닷속으로 던졌습니다. 그러자 사나운 바다가 잠잠해졌습니다. 요나와는 반대로 이 사람들은 믿음을 고백하고, 하나님을 부르고, 하나님께 부르짖고, "여호와 하나님, 당신이야말로 당신 뜻대로 하시는 분이다" 주권을 인정하고 순종하는 겁니다. 요나와는 완전 정반대죠. 요나는 "가라" 그러니까 도망갔잖아요. 딴 데로 갔잖아요. 근데 이들은 뭡니까? "나를 들어 던지라" 그러니까 실제로 던지는 겁니다. 자기 스스로 심판자가 아니라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다라고 믿고, 자기의 양심과 자기의 상식과 자기가 믿고 있는 경험과는 반대되는 일로 사람을 들어서 바다에 던지는 거죠. 여러분, 이게 하나님의 계시에 대한 반응인 겁니다. 그것이 순종의 행위, 들어 던지는 행위로 나왔어요. 앞에서 뭘 던졌습니까? 짐을 던졌잖아요. 자기 뜻대로 했잖아요. 자기 뜻대로 한 것이 이제 똑같이 던지는데 요나를 던지는 거예요, 하나님의 뜻대로 던지는 것. 던지는 행위는 비슷한데 자기 뜻대로 던지느냐, 하나님의 뜻대로 던지느냐, 여기에 차이가 있는 거예요. 여러분, 우리가 세상 사람들하고 밖에 나가면 비슷합니다. 근데 하나님의 뜻대로 밥 먹고, 하나님의 뜻대로 말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 나가느냐, 이게 차이가 있는 거예요. 여러분, 말씀이 아무리 좋아도 내 생각을 내려놓고 그거를 순종하면서 받아들이지 않으면 기도도 겉돌고 말씀도 겉도는 겁니다. 행위가 없는 거예요. 여러분, 뭘 던져야겠습니까? 여러분, 뭘 던져야 될 것 같아요? 여러분 안에 뿌리 깊이 박혀 있는 요나가 뭘까요? 내 안에 뿌리 깊이 박혀 있는 요나가 뭘까? 여전히 하나님과 씨름하고 다투고, 여전히 하나님으로부터 도망치려고 하고, 여전히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이게 뭘까? 아니면 이방 선원의 이전의 모습들, 이게 뭘까? 뭘 던져야 될까, 믿음으로?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고 나서 16절에 이들의 반응의 결론이 예배로 나옵니다. 보세요. 말씀을 듣고 계시를 받았죠, 요나로부터? "나는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자다." 그래서 여호와 하나님을 믿게 됩니다. 기도를 합니다.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순종합니다. 바다에 던지고 그다음에 뭐가 나와요? 제사가, 예배가 나옵니다. 16절 같이 한번 읽겠습니다. 그들이 여호와를 크게 두려워해 그들은 여호와께 희생 제물을 드리고 서원했습니다. 아멘. 여러분, 보십시오. 앞에서 뭘 두려워했습니까? 선원들이 4절, 5절에 보니까 폭풍을 두려워했어요. 그러다가 요나의 말을 두려워하고, 마지막 16절에 여호와를 크게 두려워했다. '가돌'이 나오죠. 큰 도시 니느웨 가돌, 가서 큰 죄악이 임했다, 가서 보아라. 그랬더니 도망가니까 하나님이 가돌, 큰 폭풍을 보내서 무찌르게 하시고 큰 두려움이 엄습하게 하시는 겁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겁니다, 하나님을 경외. 여러분, 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데서 나오는 예배가 온전한 예배인 거예요. 그래서 자기들이 자격이 없는 자들이라는 것을 깨달았고, 그러니까 이전에는 폭풍을 두려워하다가 제자들하고 똑같은 거죠. 폭풍 두려운 게 문제가 아니야. 우리가 죽을 뻔한 그런 고난이 문제가 아니야, 이제는.